나름대로 문화 생활/쓰기.

살인범 K씨 - 4.

개구리C 2010. 10. 23. 18:25


 "그럼 내일 보입시다. 잘 가소."
 "예. 쉬세요."

 사내는 주머니에서 이만원을 꺼내어 신혁에게 건내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수달촌으로 오기 전 들렸던 대형마트에서 구입한 것들을 담은 봉투가 부스럭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월촌에서 사내를 태운 후 그는 수달촌이 아니라 대형마트를 먼저 들려주길 원했고, 그 곳에서 그는 삼십분 가량 머물며 이것저것을 사 들고 온 것이었다(마트에 도착한 후 그는 또다시 이만원을 주었기 때문에 신혁으로서는 내심 즐거운 상황이었다).

 "아, 이거 하나 드소."
 "아, 감사합니다. 내일 뵐게요."

 창문을 통해 사내가 건내준 음료수를 받아들고서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신혁에게 음료수를 건내준 사내는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달촌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괜한 걸 신경쓰나."

 아직까지 약간의 온기가 남은 음료수를 만지작거리며, 신혁은 자신이 괜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사내를 만난 이후 그가 한 것이라고는 상당히 많은 돈을 운행료로 지불한 것 뿐인데, 자신은 그 돈을 고맙게 받으면서도 그에 대해 근거없는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혁은 차에서 내려 길게 기지게를 폈다. 해는 거의 져버려서 이미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꽤 피곤함을 느끼면서 그는 슬슬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평소처럼 이씨나 임씨를 불러 기사 식당으로 향할까? 아니면 은수를 데리고 와서 외식이나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그의 앞으로 택시 한대가 멈춰섰다. 

 "신혁씨, 뭐해?"
 "어, 아저씨. 이 시간에 왠일이세요?"

 그를 부른 것은 이씨였다. 평소의 이씨라면 이 시간대에는 수달촌이 아니라 시내를 돌고 있을텐데 왠일로 아직까지 수달촌에 머물러 있는 이씨였다.

 "어, 옆 동내에 손님 하나 내려주고 가는 길이야."
 "에헤, 돈 좀 버셨네요."

 수달촌과 월촌, 그리고 시내를 제외하고는, 인근의 마을이라고는 최소한 삽십분은 걸린다. 

 "뭐 그렇지."
 "아저씨 저녁은 드셨나요?"
 "또 아저씨란다. 그 소리 말고 형님이라고 좀 하라니까, 이 사람아."
 "아저씨가 입에 붙어서 잘 안되요, 그게 생각보다. 하하."

 아저씨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자 신혁은 그냥 웃어넘겼다. 
 이씨 역시도 신혁처럼 서울에서 지내다가 지방으로 내려와서 택시를 운행하기 때문일까. 신혁은 다른 동료 기사들보다는 이씨가 대하기가 편했다. 일종의 동병상련이랄까?
 혼잣말로 잠시 투덜거리던 이씨는 뭔가 생각난 듯 신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그 손님. 신혁씨가 태웠어? 어땠어? 뭐 이상한거 없었어?"
 "그 사람요? 좋은 사람같던데요?"
 "그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혁은 자신이 그에게서 어떻게 돈을 받고 있는지 간략히 설명하며, 좀 전에도 태워주었고 마실 것도 하나 받았다며 들고있는 음료수를 흔들어 보였다. 뭔가 미묘한 얼굴이 된 이씨를 보며 실실 웃던 신혁은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아니다. 뭐, 별 거 아니네요."
 "뭔데 그래?"
 "아, 그냥 명함을 두 장이나 받아갔어요. 처음에 한장 들고갔다가 잃어버렸다면서 한장 더 받아갔어요."
 "어, 그래?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신혁은 뭔가 싶어 되물어본다. 이씨는 한 손을 창틀에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명함 잃어버렸다는 사람이 어떻게 신혁씨한테 전화한거지?"
 "에이, 그거야 뭐 폰에 저장해놨겠죠."
 "그러면 폰에 저장해놨는데 명함을 또 받아갔다고?"
 "어?"

 그 말에 신혁도 웃던 것을 멈추고서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내 택시를 5년정도 몰아봤지만, 명함 챙겨가자마자 번호를 폰에 저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못 봤다. 택시 안오면 콜하면 되지, 왜 굳이 자네를 불러? 그렇다고 월촌 다니는 양반이 그렇게 적은 것도 아닌데."
 "그러고보니..." 

 그제서야 신혁도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그가 적잖은 돈을 주며 호의적인 자세로 신혁을 대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애시당초 그리 부자였음 그 사람 자차가 있었겠지. 택시를 타고 다니겠어? 뭐 좀 이상하지 않아?"
 "......"

 계속되는 이씨의 말에 신혁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뭔가 좀 이상하긴 이상했다. 

 "정말 살인자건 아니건, 그 사람, 좀 이상해. 조심해 신혁씨.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래도 살인범은 아니겠죠. 범인이면 설마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요? 옆 동내에 경찰들이 진치고 있을텐데."
 "안 그래도 방금 태워주고 온 사람이 경찰이었어. 형사님이라더라. 진짠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이씨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형사님 말로는 범인이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수상한 사람 보이면 신고해달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도 주고 갔어."
 "...그래서, 신고는 하셨어요?"
 "아니, 아직. 말 할까말까 하다가, 일단 신혁씨랑 이야기해보고 결정해보려 했지. 근데 아무래도..."
 "......."
 "전화는 해봐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신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다소 경직된 얼굴로 이씨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이씨에게 말을 하려했던 신혁이었지만 밀려오는 의심과 불안감이 그 말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신혁씨는 걱정마. 뭐, 아니면 내가 욕들어먹겠지. 아니다. 민중의 지팡이가 설마 국민한테 욕은 하겠어, 설마? 하하."

 굳어버린 신혁을 배려하는 건지, 이씨는 의도적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이후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이씨가 자리를 뜨자 신혁도 답답한 듯 긴 한숨을 내쉬고서는 차를 몰았다. 이씨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아무래도 이런 기분으로는 더이상 일을 하기가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신혁은, 이씨가 차를 몰고 떠났을 때 수달촌 안쪽에 서 있던 차 한대가 이씨가 떠난 방향으로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시동 부릉부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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