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문화 생활/쓰기.

멸망한 세상 속에서 - 8

개구리C 2010. 11. 25. 01:52




 신혁과 현아가 끌고 있는 각각의 카트에서는 크지는 않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신혁은 그 소리보다는, 자신의 카트를 현아에게 건낼 때 보였던 오르스의 그 경악한 듯한 눈빛이 더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엄밀히 따지면, 아니 대놓고 따져도 그녀는 물론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누구냐, 가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오류를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신혁이 만나본 악마는 정말로 몇 안되기 때문에 단정지을 순 없으나, 자신이 본 오르스라는 그 악마에게서는 그야말로 귀티가 흘러넘쳤다. 한눈에 봐도 베어나오는 절도와 검정색 통일의 턱시도 등, 아마도 그렇게 낮은 직위의 악마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오르스가 정중히 대하는 이가 바로 자신의 옆에서 카트를 끌고 걷고 있는 현아였다.

 그녀가 상당히 편하게 자신과 은수를 대해주었기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조금 무감각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그는 현아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무슨 이유로 자신들과 함께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되었다.
 신혁이 아는 것이라고는, 오르스가 입에 담았던 그 '이끄는 자'라는 명칭 하나밖이었다.

 '물어볼까?'

 신혁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호기심은 그런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여지것 보여주었던 현아의 태도라면, 물어본다면 답을 해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자각했던 그녀에 대한 무지는 그의 호기심에 제동을 걸었다.
 
 '말자.'

 신혁은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어차피 그와 은수에게는 그녀를 믿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들에 대하여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악마라면, 자신이 보았던 천사들과 동급의 존재라면 별다른 힘을 쓰지 않고도 자신과 은수를 처리할 수 있었다. 굳이 자신들과 지내며 공을 들여서 일을 꾸밀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위험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 할 방법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혁은 그녀가 나쁜 존재라고는 생각하기가 이제는 힘들었다. 현아가 자신들에게 보여준 태도도 태도지만, 자신들의 이치가 무너져버린 이 세상에서, 신혁과 은수가 기댈 수 있는 이는 이제는 현아밖에 없었기 때문이도 하였다.
 모가 나오든 도가 나오든, 현아를 믿는다는 선택지밖에 없는 신혁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나?"

 그런 신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한참 이야기를 하지않고 있던 현아가 먼저 입을 열며 물어온다. 내심 깜짝 놀라긴 했으나 겉으로 신혁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이번엔 물어보지 않으려고요."
 "호오, 왜지?"
 "그거야 뭐, 음."

 신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현아를 바라보았다. 현아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가엔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왠지 불안하기도 하고, 저나 은수가 알아야 할 것이면 당신이 먼저 말해주지 않을까 해서요. 그래서 안 물어보려고요."
 
 신혁의 말에 현아는 잠시 그를 바라본 후, 씨익 크게 미소 지었다. 

 "자네는 나를 믿을 수 있는건가?"

 그녀의 말에 신혁은 다소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 무슨 독심술이라도 쓰는건가?'
 "아, 혹시 뭐 내가 마음을 읽는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되네. 난 인간들 생각을 읽는 그런 취미는 없으니.'
 "...할 순 있다는 거군요."
 "필요할 땐 해야하지 않겠나?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라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지나치게 딱 맞는 타이밍으로 제 의문을 먼저 꺼내시는걸요?"
 "그거야 자네가 너무 말이 없으니, 미안하네만 조금전에는 마음을 들여다 본 거라네. 평소라면 분명 뭐라고 말을 했을텐데 아무 말도 없으니 내가 더 불안하지 않은가?"

 능청맞은 현아의 말에 신혁은 조금은 경악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아의 얼굴엔 장난끼가 서려있었다. 여지것 보지 못했던 그녀의 표정이었다.  
 
 "짖궂으시군요, 현아님."
 "그냥 현아라고 부르게. 님, 따위 붙여봐야 내가 더 불편해."
 "그런가요? 그럼 그냥 현아씨, 로 부르면 어떨까요?"
 "그정도는 상관없겠군. 이 몸도 익숙한 표현이라서."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질문 말인데요."

 거기서 신혁이 말을 끊자, 현아의 얼굴엔 다시 좀전의 그 장난끼 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기대하고 있다, 이사람! 신혁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이 마음을 읽지 않는 것은 이런 대답에 대한 즐거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 믿고 안 믿고라는 선택을 떠나서, 저로서는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서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현아님, 아니 현아씨를 믿을 수 밖에."
 "그런가? 하지만 믿고 안믿고는 자네의 선택이지 않은가. 안 믿는다고 해놓고 믿는 척 하면서 날 경계하는 방법도 있지 않나."
 "그럼 현아씨는 절 믿으십니까?"
 "믿지 않을 필요가 있나?"

 뭔가 이상한 말이긴 한데 신혁은 그만 납득하고 말았다. 그랬다. 현아로서는 신혁을 믿지 않을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읽을 수 있고 힘 또한 (아마도)자신따위가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미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뭐어, 마찬가지로 제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소용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자네. 날 안 믿는 모양이군. 난 마음을 읽지 않는다고 말을 했네만."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말씀드렸잖아요? 믿는다고."
 "아 그랬군. 미안하네."

 그리고 현아는 자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했다. 그녀의 사과에 되려 당황해버린 신혁이었다.

 "사과를 해야할 땐 해야하네."
 "예에, 죄송합니다..."
 "자네보고 한 말은 아니었네만, 어쨌거나. 이번엔 미리 가정을 하고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아까 말했듯이 믿는다고 해놓고 안 믿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실제로 열을 만나면 아홉은 그랬네만은."
 
 그 말에 신혁은 또다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모두는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그 하나에 속하는 사람이 저랍니다."
 "맞네. 자네가 유일하다네. 은수 역시 아직은 날 믿지 않아. 믿는 것 처럼 행동하곤 있지만."
 "......"

 신혁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은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고는 아무도 날 믿지 않았지. 굳이 마음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네. 몸이 다 말을 해주니까 말이야.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기도 하다네. 자네는 어떻게 날 믿을 수 있는건가?"

 겉으로는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나이의 여자아이일 뿐이지만, 그 표정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엄, 혹은 '시간'이 서려있었다. 그 그세에 신혁은 저도모르게 압도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거야..."
 "......"
 "믿지 않아봐야 저만 더 힘들테니까요."
 "그런가. 그거 명답이군."

 그녀의 말에 신혁은 작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진 않았다.

 "슬슬 다시 걷죠."
 "그러지."

 이야기가 끊긴 차가운 밤의 거리는 다시 카트가 내는 요란한 쇠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오랫만에 한편...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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