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문화 생활/쓰기.

멸망한 세상 속에서 - 6

개구리C 2010. 10. 18. 15:44


 마트에서 가져온 식료품들은 예상보다 일찍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시당초 신혁 혼자서는 한번에 많은 양을 가져올 수 없었고, 또 은수가 혼자 남는 것을 극히 꺼린다는 점에서 자주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현아가 자리잡은 이후의 소비량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거기다 현아는 생각보다 많은 양을 먹는다. 하루 한끼만 먹는 그녀지만, 그 한끼가 신혁과 은수가 하룻동안 먹는 양과 비슷한 양을 먹기 때문이기도 했다.

 "슬슬 마트에 다녀와야겠는걸요."

 방 한켠에 쌓아둔, 남아있는 식량을 보며 신혁이 말했다. 그 말에 현아는 조금은 미안했는지, 코끝을 긁적거렸다.

 "미안하군."
 "아뇨, 괜찮습니다. 솔직히 전 당신에게 정말 고마운걸요."

 신혁의 말은 진심이었다. 현아가 이곳에 머무른 이후, 은수가 전과 달리 조금씩이나마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지식은, 신혁과 은수의 궁금증에 대한 해소를 크게 도와주기도 했다. 
 먹을 것은 가지러 가면 된다. 어차피 마트에 가면 쌓여있는 것이 먹을 것이었다.
 
 "그보단, 이래된거 오늘 밤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그 땐 같이 가도록 하지.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것이 더 많이 들고올 수 있을테니."

 현아의 말에 신혁은 그녀를 바라본다.

 "혼자 다녀와도 괜찮은걸요. 그보단 은수와 함께 있어주면 안되겠습니까? 혼자 남아있는다면 매우 불안해 해서요."
 "흠. 그럼 그녀가 잘 때 같이 다녀오면 되지 않겠는가?"
 "은수는 혼자 남아있을 땐 잠을 안, 아니 못 자는 것 같습니다. 이만저만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 말에 현아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게 맡기게나."

 그녀의 말에 신혁은 뭔가 뜨악한 얼굴이 되어 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의미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별 거 아니라네."

 울퉁불퉁한 도로 위로 굴러가는 쇼핑카트에서는 여전히 덜컥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신혁은 현아와 함께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의 걱정 중 하나였던 은수의 불안이라는 문제는, 현아가 말끔히 해결해버렸다. 방에서 은수는 잠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환경이 바뀌면 이야기만 계속 해도 쉽사리 지치더군. 자네도 할 수 있지 않나?"
 "예전에야 그게 가능했었죠."

 현아의 해결법은 그녀가 은수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장장 6시간동안의 그녀들의 '수다'의 결과로, 은수는 꽤나 피곤함을 느꼈던지 일찍이 자리에 들어버린 것이다. 할 만한 대화란 대화를 모두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혁으로선, 못 할 것까진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시점에서는 하기 힘든 방법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아의 이야기라는 것은 무엇 하나 그들에겐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한번 했던 이야기라도 해도 다시 나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새롭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런가?"
 "네. 할 이야기는 거의 다 해서요. 한두번 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아, 슬슬 보이는군요. 저깁니다."

 신혁은 한 손으로 어스름히 보이는 마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현아의 시선도 옮겨갔다. 

 "꽤 크군."
 "먹을 것도 아직 많이 남아있죠. 유통기한 따져도 족히 몇년은 먹을 수 있을껄요."
 "좋군."
 "좋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꽤나 실없는 대화라고 생각한 신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느 사이엔가 현아와의 거리감이라는 것이 상당히 많이 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불과 몇 일전만 되더라도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일이다.
 현아는 저 멀리 보이는 마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신혁에게 물었다.

 "신혁, 너는 알고 있었나?"
 "네? 무엇을 말입니까?"
 "모르는 모양이군. 여태 몇 번이나 저 곳을 다녀왔지?"
 "글쎄요. 한 달에 두, 세번정도 다녀왔으니 30번은 넘어가지 않을까요?"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신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말이지."  

 무언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물어보지 않아도 이것저것 말해주던 현아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보다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신혁은 긴장했다. 
 그 모습에 현아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해가 되는 것은 아닐게야. 일단 가자구나."
 
 그 후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대략 10분 정도까지, 신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가 될 것이 아니라고 해도, 수십번을 들락거렸던 곳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또 불안해졌기 때문이었다. 현아 역시 딱히 입을 열어 그의 불안을 덜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물어보면 이야기를 해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는 가서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걷는 내내 애써야 했다.
 이윽고 마트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신혁은 현아가 발걸음을 멈추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불안해하는 신혁을 놔둔 채, 현아는 그 자리에 멈춰서 건물 위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오게."
 "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대답한 신혁이었다. 하지만 현아의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자, 잔뜩 긴장한 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징벌자의 미천한 종, 오르스라고 합니다."   
 "헛?"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신혁은 깜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그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부딫히자, 신혁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으악!"

 신혁은 놀라 소리지르며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버렸다.
 자신과 부딫힌 것은 다름아닌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이마엔 한뼘정도 되는 뿔이 솟아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등 뒤에는 날개 비슷한 것이 달려있다.
 그는 악마였다.
 상체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하는 그를 보며 현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네, 오루스. 그런데 자네가 이곳에 있다는 건, 징벌자께서도 현세로 올라오셨다는 것인가?"
 "네. 얼마전에 열린 문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그러고보니."

 악마, 오르스는 아직도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신혁을 보며 말했다.   
   
 "이 인간은 이미 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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